2년 전,
장자연이라는 여배우가 사회 기득권층으로 일컫는 짐승들의 먹이로 쓰러져 갈 때, 이 사회는 그녀를 돌봐주지 않았다.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녀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유언을 남기고 자신의 삶과 인생을 내치면서 부도덕한 자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주길 바랬지만, 여론의 잣대는 노무현의 인격살인에 집중하던 시기라 강자의 정치적 논리에 부합하여 심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었다. 며칠 전 SBS의 보도에 의해 유언장이 다시 공개 되면서 침묵하던 조선일보의 김대중이라는 언론인은 우리나라에서 세 가지 민감한 사안(여성, 종교, 지역)은 안 건드리는 것이 좋다라는 논리로 상식적인 정의를 교묘하게 비켜갔다.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서 통찰하고 반성하기 보다는 부도덕한 궤변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가두어 놓고 우리를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고 수구기득권이 주장하는 사회정의이다.
여러분은 동의 하는가?
내가 거주하는 미국이라는 사회도 역사적으로 민감한 사안은 비켜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슈가 충돌할 때 마다 지혜를 모아 도전과 반성을 거듭해 왔다. 지역문제는 이미 남북전쟁으로 넘어섰고, 여성문제는 지금까지도 민감한 이슈지만, 여론을 형성하고 지혜를 모아 좋은 법안을 도출해 내고 있으며 종교가 사회에 저지르는 부정 부패에 대해 과감한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어제도 아동 성추행이라는 저질렀던 21 명의 신부를 징계하기에 이르렀다. 종교가 사회의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 말이다. 아무리 민감한 사안 일지라도 사회악이 될 경우에는 가차없는 응징이 따랐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 지역, 종교를 포함한 이슈 중에 더 보태자면 200여 년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흑백간 인종차별 문제이다. 흑인에게 백인은 넘어설 수 없는 기득권 세력이고 KKK 집단은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전위대 같은 존재다. 흑인들은 피부색이 변하지 않는 한 이 벽은 영원히 허물 수가 없다고 여기고 있으며,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 기득권층 등이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발언도 선심성 정치적 발언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 흑백간의 인종차별은 더 나아가서 백인을 제외한 모든 인종에 대한 차별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차별을 제어하기 위해서 많은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백인들은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에 살면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미국을 헛 살았을지도 모른다. 쇼핑을 하거나 길거리에 마주쳐도 듣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셀 수 없을 만큼 겪는 곳이 미국이다. 그만큼 피부에 와 닿은 표현이며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나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은 이런 이슈에 말려들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한 사고로 인하여 때로는 곤혹을 치른다.
얼마 전 공화당 경선 주자 허커비는 오스카 여우 주연상 수상자인 나탈리 포트만의 혼전 임신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다는 발언을 했다가 바로 사과 했었지만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인종차별적인 요소는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같은 공화당 경선 주자인 알래스카 주지사를 역임한 사라 페일린 딸의 혼전 임신에 대해선 일침을 가했다는 말을 들어 본적도 없다. 미국 상류층의 반 유대적 정서를 느낄 수가 있다. 한국에 있는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유대인의 경제력을 가지고 미국 내 상류층 계급으로 착각하는 점인데, 그들은 경제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미국의 상류층을 지배하는 3대 잉글랜드 족(잉글리시, 아이리시, 스카티시) 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만큼 미국의 상류층은 아직 반 유대정서가 남아있다는 점이고 아직도 순수 백인 혈통이라고 자랑하는 그룹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1960년대 들어서서 흑백간 차별은 케네디 대통령과 진보적인 민주당의 정책으로 격차가 좁혀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현재 미국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정점을 찍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우리나라의 진보 언론인은 오바마가 순종 흑인이 아니고 백인의 피가 흐르는 흑인이라는 궤변을 주장하던데, 앞서 얘기했듯 백인이 아닌 인종은 영원한 마이너리티라는 사실만 알기를 바란다. 제발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을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추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미시시피버닝’이라는 영화도 흑백간 혹은 반 유대인의 인종차별 이슈를 직접 다뤘지만 내가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A time to Kill’이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두 가지 사안 때문이다.
첫 번째는
2009년 현 정부와 진보를 포함한 모든 언론이 노무현의 인격살인에 쏟아 붓고 있던 시기에 터진 장자연 사건이 수구언론과 기득권층을 향했다는 점에서 무척 귀찮은 존재였고 가능한 묻어 버리고 싶었던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여성 더 나아가서 연예 기획사의 잘못된 관행을 들춰내어 수구들의 더러운 짓과 그 소외계층을 파 헤치기 보다는 검찰의 방향은 노무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정국이라 허위 사실 공표로 노무현에 대한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았었다.
어쨌든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번 SBS 방송사의 보도로 수사 은폐 의혹이 밝혀졌기 때문에, 강희락 당시 경찰청장과 경기도 수사 책임자였던 조현오의 책임은 영원히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수구들과 막장 언론의 정치적 게임논리로 장자연 사건 2달 후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어 버렸고 잃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바로 서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계속 후퇴할 것이다.
두 번째는
성인들이 집단 성폭행한 여중학생 사건에 사법부의 판단은 합의한 성행위는 처벌 할 수 없다는 점에 분노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도 주인공의 10살 된 딸을 강간한 자를 처벌한 복수가 정당방위냐 아니냐의 법리적인 문제이지만, 변호사측 증인으로 나오는 정신과 의사 이야기도 있다. 검사는 이 증인에게 반론을 하면서 과거에 미성년자와의 성행위 이력으로 결격 사유를 증명하며 증인과 주인공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 23살인 남자가 17살 여자와 성행위를 했다는 점은 분명 잘못된 것은 사실이며 처벌을 받으므로 서 증인인 의사의 경력에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은 그녀와 결혼을 했으며 아직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해 오는 점이다. 즉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논리지만,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A Time to kill’ 영화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미국 남부 미시시피에서 두 백인이 10살짜리 흑인 소녀를 납치하여 강간하면서 이 영화는 시작 된다. 기껏해야 10년 형 정도 선고를 받고 풀려 날 백인 피고인들에게 흑인 소녀의 아버지 칼 리(사무엘 잭슨)는 첫 공판 일에 법원에서 두 백인을 사살한다. 나름대로 정의감에 앞서 칼 리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제이크(메튜메커너히)는 다음 주지사를 노리는 검사 루퍼스(케빈 스페이시)와 서로의 정의를 위해 재판에서 불꽃 튀는 설전을 벌인다.
정의는 무언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를 논하기에 앞서서.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말하는 정의는 각 개인마다 다르고 각 계층별로 다른데, 강자와 약자, 기득권과 소외계층이 말하는 정의는 같지 않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공정하게 심판해야 함에도 간혹 그 정의는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괴롭힌다. 유전무죄라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건희, 이명박의 정의가 다르고 나의 정의가 다를 텐데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미국과 우리나라의 사법제도가 다른 점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특징적인 것이 사법부의 배심원 제도이다. 판사는 검사, 변호사를 중재하고 통제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검사와 변호사는 판사를 설득하기 보다는 배심원을 설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배심원에게 합리적인 논리와 증거를 제시하고 설득을 이끌어 냄으로써 검사와 변호사는 자신의 게임으로 만들어 가야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정의가 합리적인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정치적인 입김이나 강자의 입김이 들어갈 소지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변호사 제이크의 정의는 흑인일지라도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검사 루퍼스의 정의는 칼리의 심정은 이해하나 법의 심판에 맡겨 처벌했어야 된다는 논리이다. 검사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배심원 중에 흑인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과연 공정하고 정상적인 배심원 판결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 각주마다 법은 다르지만 미국 미시시피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서는 정당방위로 살인을 하였을 경우에 정당방위를 입증 하게 되면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칼리는 무죄를 판결 받기 위해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살인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고(법원 청사까지 들어가서 살인을 했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이끌어 내려면 정신병력으로 승부를 해야) 반대측 검사 입장에서는 제 정신이었다는 것을 입증 해야 한다.
검사와 변호사간의 정의가 이렇게 다르며, 흑인과 백인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배심원 선정 문제부터 모든 사안이 불리한 칼리의 재판을 공정하게 이끌기 위해서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하느냐?
우리도 정의롭지 못한 사건에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여론을 형성하여 청원을 하거나 집회 시위를 한다. 이 영화에서도 칼리를 지원하기 위해서 흑인 단체가 나서게 되고, 칼리에게 살해 당한 두 백인을 지원하기 위해서 KKK 단체가 나선다. 물론 재판 최종판결 이전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집요한 살해 협박이 계속 이어 지지만 정의를 거스를 수는 없다. 변호사 제이크는 칼리가 사형선고까지 받을 수 있는 불공정한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 배심원들에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설득밖에는 없다. 최후변론에서 제이크는 배심원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주문을 하고, 칼리의 딸이 납치되어 강간 당하는 장면을 자세하게 이야기 하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만일 그 소녀가 백인이라면?”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는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인과 흑인간의 갈등구조를 우리나라 사회구조와 바꾸어서 설명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즉. 흑인은 우리나라의 소외계층이고 백인은 기득권이라면 당신의 정의는 무엇인가?
장자연 사건을 돌아보자.
현재까지 기사화 되어 보도 된 자료만 보면 31명의 남자가 한 여자를 강간 성폭행한 사건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리스트에 들어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이지 왜 그런 사회 병폐현상이 나타나는지를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현 정부가 도덕성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 노무현을 인격 살인하고 장자연 사건을 덮어 버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정치적 논리로 사회정의를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는 점이 나를 분노케 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돌아봐라. 자고 일어나면 수 없이 터지는 사건들. 그런 사건에 묻혀서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지는 억울한 사건과 사연들을 귀 기울어 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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