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아네스에게
‘시’ 아네스에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정치적이든 아니든
보는 이 가 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영화다.
가진 자와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는 뼈아픈 충고이고 조언이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들에게도 고통이다.
시골의 어느 개인병원에서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 진단을 받은 미자 라는 할머니는
재혼을 한 딸을 대신하여 손주를 맡아 기른다.
그녀에게는 어느 아이들처럼 철부지 손자이지만,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폭행하여 자살에 이르게끔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시를 생각해내고, 시를 토해내고 싶어도 글로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그녀는
아름다운 시를 어떻게 표현을 해야만 하는지를 자신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도
알츠하이머라는 기억의 사라짐에 한 문장씩 적어 나간다.
우리에게 시는 무엇이고
우리에게 희망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절망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죄를 지었어도 합의금으로 대신하여 우리의 원죄를 사하면 된다는 말인가?
돈이면 다 되는 세상,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만 하면
지우개로 말끔히 싹 지워버려도 되는 알츠하이머 같은 세상에
아름다운 시를 토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사회적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자식을 키우는 부모도 필요 없는 세상이고
제자를 훌륭한 사회인으로 길러내 줘야 하는 스승도 필요 없는 세상이라서?
중풍에 걸린 노인에게 자신의 몸을 주고 손자의 합의금을 마련하여 원죄를 씻어버리면
이세상의 고통은 저절로 치유가 되고,
자신의 몸을 능멸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소녀의 억울함은
돈으로 환산하여 받아버리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 따위는 무시해 버리자.
어차피 지옥 같은 세상 내가 너를 탓하고 네가 나를 탓해서 무엇 하랴.
익은 살구가 떨어져 세상을 기름지게 하는 대자연의 순수한 원칙을 알면서도
가볍게 여기는 자 너는 누구냐.
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한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던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돈으로 원죄를 박박 지워버리자.
그러므로 해서 너와 나 우리가 이 세상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식을 잘못 기른 건 원죄가 아니다 다만 알츠하이머 같이 우리는 기억 속에서
박박 지워버리면 된다. 살갗이 터져 피가 흘러내릴 때 까지...
그녀는 세상은 깨끗하게 살아가야 된다라는 자책감으로
손주의 손과 발톱을 깎아주고 평화로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적(?)인 메시지를 이 모든 세상사람에게 던져주고
‘아네스에게’라는 시를 선물로 대신하여 원죄를 받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너무 더럽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죄를 돈으로 환산하는 세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자식의 잘못을 돈으로 환산하여 지워버리면 된다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라서 그럴 것이다.
“다 타버린 연탄을 함부로 발로 걷어차지 마라. 너는 한 순간이라도 뜨거웠던 적 있는가”
세상을 등진 채 흐느껴 울던 그녀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고 그렇게 가 버렸다.
자신의 원죄, 내 탓이다 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