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하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맞았던 나도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익숙한 편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패를 하면 꿈을 꾼다 라고 단정하고 싶다.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내가 존경하든 안 하든 내 주위에 스쳐 지나갔던 혹은 아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또 다른 나의 삶을 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업하시는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시리가 판단한다.
어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한 새한미디어의 차남 이재찬씨의 경우도 그렇다. 몇 백억을 가졌던 자가 사업에 실패하고 몇 억, 몇 십억의 사업이 간에 차겠냐 만은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힘든 나날들의 그를 어느 한 순간 알았던 사람으로서 애도를 표하고 싶다 진정으로.
1994년인가?
그와 그의 형(이재관) 그리고 몇몇 부하 직원들과 커네티컷 모처의 IT 연구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아이티 산업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거인지도 모를 때였고 고작 비퍼(삐삐)나 커다란 핸드폰이 유통될 때였으니 소프트보다 하드웨어 기자재 정도로만 생각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의 스마트 폰을 꿈꾸고 있었다 분명히. 아마 잡스가 그의 아이디어를 훔쳐갔을지도 모른다는 섬직한 생각도 해 본적 있다. 비록 실천에 옮기거나 그냥 꿈만 꾸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그림은 분명 스마트폰과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차를 유독 좋아하던 그는, 왕복 5시간 거리의 운전이 피곤하지도 않은지 나의 차를 직접 몰고 싶다면서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운전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혹 사람들은 삼성가의 자식들은 싸가지가 없을 것이다 아니면 버르장머리가 없을 것이다 내지는 사치심이 많을 것이다라고 단정하겠지만 내가 겪어 본 그들은 검소하다. 그것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다. 물론 이재관, 이재천 형제를 삼성가로 꼭 집어서 얘기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병철의 둘째 아들인 이 창희씨의 자식들인 그들은 삼성의 보호를 받았던 사람들은 아니다. 소소하게 보호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IMF 터지고 새한미디어가 분식회계로 정리가 되면서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어렴풋이 어떻게 살아가나 가끔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그의 자신에 찬 얼굴, 부하직원들과의 격의 없던 태도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긍정적인 면으로 다가온 것은 사실이다. 내가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그의 열정은 많은 교훈이 되었고 진심으로 다가왔었다.
그 후,
맨해튼에서 짧은 해우가 있었다. 56가에 있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이었던가? 그때 그를 잠시 본 순간 이 세상에 지쳐있는 피곤한 모습이었고 그 자신만만했던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아쉬웠었다. 아...... 사업을 크게 하던 사람이 무의미 해진다 라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서로 짧게 목례로만 대한 눈 인사는 그렇게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어제 그가 갔다.
삼성보다 앞서서 IT를 꿈꾸었던 열정의 그가 이웃과의 소통도 없이, 행복한 가정의 보살핌도 없이 한 순간 가버렸다. 어쩌면 불쌍하게도..
그를 애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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