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약국을 경영하는 성격 좋은 남자는 정신질환을 앓는 형을 찾아나서는 게 하루 일과입니다. 형 때문에 헤어졌던 여자가 찾아와 곧 결혼한다는 말에 화는 내지 않지만, 함께 자러 간 허름한 여관에서 스웨터가 브라의 훅에 걸려 옷을 못 벗고 허둥대는 애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한심스러워 밖으로 나옵니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거액의 빛을 갚기 위해 정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자는 가족과 기분 좋게 놀러 간 노래방에서 결혼하겠다는 동생의 말에 화를 냅니다. 매달 날라오는 빛 독촉에 자신은 힘겹게 살아가는데 도와주지는 못하고 만세 부르고 임신 핑계로 시집가겠다는 동생이 무책임하다며 애를 지우라고 합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형을 가진 약사 인구(한석규)와 아버지가 남겨준 빛을 물려받은 패션 디자이너 혜란(김지수),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이 둘의 삶은 너무 고단합니다.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만큼 사랑할 시간조차 버거운 이들을 그린 변승욱 감독의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의 이야기입니다.
동생 때문에 화가 난 혜란이 강한 수면제를 사기 위해 약국을 찾았지만 인구는 처방전 없으면 안 된다고 거절하고 운동이나 하던가 맥주를 마시라고 권유합니다. 그래서 함께 맥주를 마시게 되고 서로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 내면서 이 둘은 친해집니다. 좀 전에 인구가 애인을 뒤로하고 나왔던 여관으로 혜란과 함께 들어갑니다. 하지만 섹스 후, 눈을 떴을 때의 현실은 서로를 품어주고 사랑을 하기에는 이들의 삶의 무게가 너무 고단합니다.
혜란은 디자이너라지만 원칙대로 살기에는 빛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홍콩까지 날아가 명품브랜드를 보고 동대문시장에서 짝퉁을 만들어 팔다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도 일상이고 신고한 여자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패야 속이 풀리는 억척스런 여자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고단함에 혼기를 놓친, 그래서 사랑은 생각도 못했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마음속에 사랑이 자리잡아, 주고 싶지만 선뜻 받는 것이 부담스럽고 또 사랑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현재 살아가는 모습이 피곤한 삶의 연속입니다.
혜란에겐 빛을 청산할 돈이 있어야 되고, 인구에게는 정신질환을 앓는 형이 있습니다.
인구와 혜란은 함께 잠을 잤어도 만나면서 키스하고 애정을 표현하기에는 순수하고 서툽니다. 까칠하고 무례해 보이는 것이 강한 것이라 생각하는 혜란이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인구에게 다가서려 하지만 인구 또한 애정을 표현할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혜란은 자신의 피곤한 삶을 인구에게 이야기 해 주지 않습니다.
왜 경찰서에 끌려갔고, 왜 옛 애인과 비 오는 골목길에서 싸웠고, 왜 차에서 내려 달라고 화를 냈는지 변명하지 않습니다.
함께 여행을 간 새벽 낚시터에서 인구가 휘파람 불며 들려주던 ‘즐거운 나의 집’을 혜란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매일 다섯 시에 들려주던 추억을 얘기해 주고 확인하기 위해 학교로 향하지만 결혼 허락을 받겠다는 동생의 애인 전화로 잠시의 행복은 깨져버립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사랑은 내게 현실이 아니다라고 믿으며 차에서 내려달라고 인구에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날 혜란은 약국에 찾아와 그 동안의 무례했던 행동에 대해 자신의 피곤한 삶을 이야기 해 주면서 서로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합니다.
부친의 제삿날 발작을 일으킨 인섭(이한위)을 찾아 나섰던 어머니(정혜선)가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장례식장을 찾은 혜란은 인구에게 위로해 주고 싶지만 내색도 하지 않고 밖에 나와 벤치위에서 흐느낍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 강해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사랑의 열병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후, 인구는 혜란을 찾아가서 자신에게도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지만 형 때문에 여자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는 얘기를 해 줍니다. 형이란 존재는 살아오면서 항상 큰 부담이어서 자신의 삶에서 제발 사라져 버렸음 했다고 얘기합니다.
이 둘은 그렇게 헤어집니다.
인구는 어머니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유품을 정리하다 젊은 시절 부모가 주고 받은 편지와 녹음 테이프, 형의 사진을 보면서 자책감을 느끼고 형을 정신병원에서 데리고 나와 어머니의 사랑, 빈자리를 대신하기로 마음 먹고 형이 좋아하는 등산을 함께 갑니다.
혜란 또한 자신의 삶이 고단하다고 동생까지 얽매어 놓지 않으려 행복한 마음으로 결혼 시킵니다. 삶이 피곤하다고 행복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죠.
어느 날 혜란은 인구가 보낸 편지 안에 인섭과 함께 찍은 등반사진을 받고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로 달려가 다섯 시에 흘러 나오던 노래 ‘즐거운 우리 집’을 인구의 전화메시지에 녹음시킵니다.
이 영화는 볼 때마다 늘 새롭게 다가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석규와 심은하가 출연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같은 아련한 사랑 이야기지만 이 영화는 아프면서도 슬프지 않고 희망을 주는, 그래서 김지수가 출연했던 작품들이 사랑의 상처를 이야기해도 쓸쓸하지만 결국은 둘이 이어지고 사랑이 이어질 거라는 희망을 줍니다.
대부분 서로에 이끌려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현실을 깨달았을 때 그만치 뜨거웠던 사랑은 지나갑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능력을 보고 어떤 사회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재단했을 때의 사랑은 첫사랑만치 열정적이지 못해서 지워져 버리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도 삶의 고단함으로 사랑을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이성 문제를 떠나 가족의 생계문제로 자고 일어나면 아이를 버리는 사람들, 아이를 죽여버리는 사람들, 삶의 고단함 때문에 함께 생을 포기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비록 사랑이란 것이 아픔 없이는 기억되지 않겠지만 쉽게 잊혀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나쳐버린 시간 속에서 부족하더라도 나눌 수 있다면 행복한 것이겠죠.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서 헤어진다면 그만큼 아쉬운 사랑이 어디 있을까요? 사랑하면서도 표현을 하지 못해 거스름 돈을 쥐고 나와 울면서 걷는다든지, 장례식장 밖 벤치 위에서 통곡하는 장면은 슬펐습니다.
사실 변명이란 것이 자주하면 이유가 되고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표현을 적극적으로 못 하는 사람도 있겠죠. 표현하지 못했던 혜란과 인구의 사랑이 아름다워 보였던 것은 가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은 가식적이거나 이율배반적이면 안 되겠죠.
PS: 2007년, 2010년에 두번 포스팅했던 글을 부분 수정해서 다시 올렸습니다. 시간 나실 때 꺼내 보시도록. 송골매의 '세상만사'라는 곡은 인구 형 인섭이 좋아하는 곡으로 영화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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