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장소에 문득 와 봤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평행이론처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친근한 느낌, 추억이 새겨져 있을 아련한 느낌, 마치 첫사랑의 달콤함처럼 전생에 인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 봤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박하사탕’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상당히 무겁습니다. 몇 개의 이야기가 무겁게 진행되고 나서야 기차가 거꾸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과거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눈치챕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영혼이 지칠 대로 지쳐버린 영호가 “나 돌아갈래’ 외마디말로 죽음을 선택하지만 마지막 닿은 곳은 순수했던 청년 영호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해피앤딩은 아니지만 구질구질하게 비가 내리다 맑은 하늘의 아침을 맞았을 때의 느낌 같습니다.
순수했던 이 청년을 왜 이토록 바꾸어 놓았을까요?
현대사에 획을 그었던 광주민주항쟁으로 일컬어지는 518은 박정희 군사독재정부의 장기집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의 봄이 진행되던 시점에 또다시 싹을 잘라버린 독재자 전두환의 등장이었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자들이 선택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순수했던 청춘을 날려버리고, 잊을만하면 저려오는 다리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청춘을 선택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영호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영호가 식당에서 과거 고문했던 피의자를 만났을 때 화장실에서 물어봅니다.
“아직도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까?”
과거에 피의자의 일기장에 적혀진 삶은 아름답다라는 구절이 기억나 다시 물어봅니다. 하지만 피의자는 반갑게 웃으면서도 영호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길 뿐 감히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과연 그 둘에게 삶은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고문의 고통을 뼈저리게 아는 그도, 고문을 했던 영호도 고통스런 추억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첫사랑 순임이 군복무중인 영호에게 면회를 갔던 날은 광주에 진압군으로 떠나던 날이었고, 경찰에 근무하던 영호를 어렵게 찾아와 만난 날은 영호가 처음 고문해본 날이었습니다. 이미 다른 형사들에게 고문 받아 두려움에 떨던 피의자는 영호의 고문에 똥을 싸버립니다.
영호의 두툼한 손이 좋아,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했던 순임의 고백에 영호는 식당에 일하는 여자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고 이 손이 착하게 보이냐고 물어봅니다.
사람을 죽였는데, 사람을 고문해서 똥이 묻었던, 사람을 고통 받게 하는 손이 아름다워 보이냐고 차마 순임에게 묻지 못하고 자신에게 묻습니다.
순수했던 그들의 사랑이 이 세상에 지워지는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순임의 눈물 한 방울이 건조하고 짜증나는 사회를 바꾸어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행복했던 그들의 추억이, 기억이 순임의 눈물 몇 방물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영호는 순임을 선택하기 보다는 차라리 불쌍한 영혼을 가진 현재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식당 여자와 기도하고, 섹스하고 부인으로 맞이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세상은 그들에게 여유로운 삶도, 아름다운 삶도 주지 못합니다.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지만 선택하지 않은, 결국은 타인의 강요에 의해 같은 민족에게 살인을 저지르고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고통 받고 살아야 하는 당시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역사에 올바른 선택이 아님에도 많은 청춘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가고 있고, 지워버리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물론 고통이 지워진다면 좋겠지만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고 상처는 지울수록 커지게 마련입니다.
다리가 저려올수록 느껴지는 고통의 무게만큼 사회는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달콤한 세상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순임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영호에게 선물해 주었던 소중한 카메라를 단돈 4만원에 팔아버리는 것도, 둘만의 소중한 추억이 있을 필름을 찢어버리는 것도 삶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영호의 자책일 겁니다. 이 세상과의 단절만이 고통을 묻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영호의 바램이겠죠. 상처 받은 자를 위로해 줄 수는 있어도 지워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시위주동자를 검거하기 위해 군산에 내려갔을 때도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는 술집여자에게 그녀가 걷고 있던 길을 내가 걷고 있고, 그녀가 숨쉬는 하늘 밑에 나도 숨쉬고 있고, 지금 내리고 있는 비를 그녀도 맞고 있을 거라는 그의 말에 술집여자는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다음날 그녀와 해장국이나 먹으려는 영호의 바램도 피의자의 검거로 이루지 못합니다. 그가 떠나간 자리에 그녀만 존재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여자는 기다리는 존재밖에는 안 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5월 18일, 광주민주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작언론에 속아 폭도들의 반란 정도로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저 또한 미국에 와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시민이 잔인하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를 했었습니다. 벌써 오랜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빛 바랜 비디오의 잔인한 장면을 떠 올리는 기억만으로도 쉽게 고통을 지울 수 없을 텐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살아갈까요?
영화 ‘건축학개론’같은 첫사랑은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은 변해가는데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거 같습니다. 아니 사람은 변해가는데 사회는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사회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도덕적 요구가 묵살되고 진보가 후퇴하고, 부패하는 세상이라면 사회는 변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기준과 합리적 판단이 없이 행해지는 요즘의 정치적 행태를 지켜보면서 억울하게 광주에서 희생되었던 분들에게 죄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오랜 세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518의 피해 당사자들에게 삶은 아름다울 수도 있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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